왜 ‘북(北)일동’의 빼어남을 여전히 칭송하는가
왜 ‘북(北)일동’의 빼어남을 여전히 칭송하는가
  • 골프산업신문
  • 승인 2023.01.30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석무 작가의 대한민국 명작 골프장 해석 (3)
일동레이크에는 백두대간의 장엄한 흐름이 감돈다. 페어웨이 언덕에서 보면, 먼 산줄기들이 파도치듯 유장하게 흘러가고 땅 밑에선 바위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바람을 부르는 듯하다.
일동레이크에는 백두대간의 장엄한 흐름이 감돈다. 페어웨이 언덕에서 보면, 먼 산줄기들이 파도치듯 유장하게 흘러가고 땅 밑에선 바위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바람을 부르는 듯하다.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류석무 작가의 글을 연재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골프장들의 이야기들을 상세히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한국 명작 골프장 해석’은 ‘이야기’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어간 ‘해석’을 통해 새로운 문화 지평을 발견하는 ‘대안 비평’입니다. 한국 최고의 골프장 스무 곳을 차례로 톺아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골프코스 설계자 김학영(사진, 1937~)은 경계인(境界人)이었다. 

그는 젊은 날 고국을 떠났다. 뚝섬의 양조장 집 아들이었던 그는 길 건너 서울컨트리클럽 ‘군자리코스’에서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이던 연덕춘의 제자로) 골프를 익혔고, 스무 살 무렵엔 홍콩과 필리핀 등지의 아시아권 대회에서 300야드를 넘나드는 장타로 주목받았다. 제일모직 소속으로 당시 이병철 사장과 정·재계 인사들에게 골프 기술을 교습하기도 했으나, 이십 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골프 투어 선수로 활동했다.

일본 생활 중에도,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선진 골프 견학의 임무를 받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등지의 유명 골프코스들을 살펴보았으며, 명문 골프장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연구하여 보고했다.

그 과정에서 골프코스 설계와 조성에 관해 탐구하게 되었다. 1963년 제6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K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지만, 그는 투어프로 생활보다 골프장 설계·시공 회사의 도제식 전문직원으로서 이론과 실무를 익히는 데 주력했다.

코스 설계를 제대로 수련한, 프로골프 챔피언

그는 한국인 가운데 처음으로, 골프코스 설계·조성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수련한 전문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코스 설계자라 할 연덕춘의 작업이 일본에서 선수 생활할 때 경험한 코스들을 재현하는 방식이었고, 그 뒤 ‘1세대 전문 설계자(로 불리는 이)’들이 관급 골프장 건설의 토목 엔지니어로 시작하여 외국인 설계자들의 국내 골프코스 현장 실무를 맡으며 스스로 전문성을 깨우쳐 나간 것과는 다르다.

골프선수로도 골프장 설계자로서도 김학영은 경계인이었다. 청장년기 삼십여 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했고, 귀국한 뒤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일했다. 서구 골프코스들의 실체를 일찍 체험한 그는,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골프장들의 정원 지향 정형성을 벗어나고자 부딪쳤으며, 한국에서는 골프장 조성 비즈니스의 불합리한 관행 또는 비전문성과 타협하기 어려워했다. 

일동레이크 골프클럽(이하 ‘일동레이크’)은 김학영이 오십 대 중후반(1995년)에 완성한 역작이다. 그의 국내 첫 설계 코스인 제일 컨트리클럽(1986년 개장)이 재일교포 소유주의 취향을 따라 일본 골프장의 전통적 스타일을 택했던 데 견주어, 일동레이크는 설계자 스스로의 스타일을 능력껏 펼친 작품이다.

당시 이곳 땅 주인이 직접 개발하다가 파라다이스 그룹에 넘겼고, 다시 SK그룹이 인수하여 완공했는데, 김학영이 처음부터 설계하고 조형 공사와 마감 하나하나까지 감리했다.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자본 부족으로 아쉬운 부분은 있었으나, 완공 때까지 소유주의 뜻에 휘둘린(설계 의도가 왜곡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후 2001년에 ‘농심그룹’이 인수했다.)

‘북일동 남화산’의 진정한 의미

“한강 이북에서는 일동레이크가 일품이고 이남에는 화산이 아름답다.” - ‘북일남화’라는 칭송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골퍼들에게 수십 년 동안 전해져왔다. ‘명품’이라 불리는 골프장들이 그동안 숱하게 한국 땅에 조성되었음에도, 이 두 곳은 빼어난 골프장을 말할 때 간단없이 꼽혀 왔다.

하지만 ‘무엇이, 어디가, 어떻게 뛰어나고 왜 아름답다고 하는가?’ 하는 물음은 깊이 제기된 적도 풀이된 적도 없다.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른 지금, 북일남화의 가치가 아직 유효한가 그 빼어남의 본질과 실체는 무엇인가 새겨볼 만하다.

한국 골프장들은(지난 10월에 게재한 안양CC 편에서 말을 꺼냈듯이) 구십년대 초반까지 일본 골프장들을 모방하려 했고 그 뒤로는 서구 골프코스 흐름을 따르려 애써왔다. 그것이 한국 골프장들이 처한 형편이라고 안위했거나, 세계 골프의 변방에 있는 한국 골프코스가 존재의 정체성을 얻는 길이라고 여겼다. 일동레이크도 화산CC도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다른 곳들에 견주어 몇 가지 선명한 특징을 보이며 두드러진다. 

첫째, ‘북일남화’는 한국 산야의 고유한 특질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발견하고, 그대로 살려내 골프코스로 빚은 작품들이다. 이 미학적 자각은 한국 골프장 흐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랄 만하고, 지금도 뚜렷한 정체성과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둘째, ‘북일남화’는 (설계·조성한) 아티스트의 관점과 기예가 코스 앉음새부터 조형·조경 마감까지 일관되게 발현된 코스들이다. 한국인이 설계한 것으로는 초유의 ‘작가 책임주의’ 작품들이며, 이후에 해외 유명 설계자 이름을 건 한국 내 골프코스 조성 작업에서도 드문 예다. 코스 곳곳에 장인적 개성과 애정이 스며들어 있다. 

셋째, 경기장으로서 코스 자체의 완결성과 캐릭터가 선명하다. 한국 골프장 역사에서 드물게 ‘전승될만한 내재적 영속 가치’를 (유지하여) 품고 있다.

간략하게나마 하나하나 살펴보자.

한국의 골프코스 조성의 시대적 3중 과제

초기 한국 골프장들은 일본의 전통적 골프장들의 정형성을 성찰 없이 도입했다. 골프코스는 스코틀랜드 바닷가 링크스에서 발원하여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각 지역 땅의 특질, 문화적 양식에 적응하며 다양한 스타일로 변모하였는바, 우리가 처음 받아들인 유형은 일본 전통 정원 관념으로 조경한 산책 정원 스타일의 골프코스였다.

(일본인들은 정원에서 자연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두지 않으려 한다. 정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부문에서 인공으로 섬세하게 다듬은 뒤에야 완성된 것으로 본다. 또한 형식과 법도를 만들어 정형화하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습성이 완고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양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을 자신들의 형식으로 정형화하여 파급·학습하는데 큰 성취를 거뒀다.

골프코스를 처음 도입할 때도 그런 패턴을 따라, 일본 전통 정원의 세계관과 인공적 형식을 결합하여 적용했다. 링크스 지대 혼돈의 자연에 최소한의 질서를 부여하는 데서 비롯된 골프코스가, 대척점에 있달 만큼 극단적으로 정형성을 중시하는 문화와 만나 특이하게 혼융된 것이다. 절묘한 합일 또는 지평의 확장이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본질의 변형이라 할 수도 있다.)

1990년대 이후 서구의 설계가들이 한국에 들어와 코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한국 골프장들은 일본풍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과 미국의 골프장들을 직접 경험한 이(소유주, 골프장 전문인)들이 골프코스 조성에 참여하면서(전문 매체 등을 통해 세계 유명 골프코스들에 대한 정보가 보급되기도 하면서), 골프코스 트렌드의 세계적 본류에 편승하려는 설계·조성 작업들이 경쟁적으로 펼쳐졌다.

서구의 유명 골프장들처럼 자연 지형의 흐름을 살려 코스를 조성하는 것, 플레이의 도전성(위험과 보상, 변별력, 경기성 등)을 추구하는 것, 서구 유명 골프장들이 이룩한 범례를 모방하여 만드는 것 등의 노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되었다. 

우선 새로운 경향을 빠르게 받아들여 적응하고(1단계), 한편으로는 한국 산야의 특질과 조화되도록 완성하며(2단계), 마침내 고유한 독창성을 확보(3단계)하는 삼중과제를 동시에 풀어내는 것이, 이 시대 이후 한국의 골프장 전문인들 앞에 놓인 소명이자 갈림길이었다.

일본풍 골프장들의 정형성을 따르던 이들은 서구 유명 골프장들의 범례를 - 일본식 패턴을 따를 때처럼 - 모방함으로써 사업적으로 적응(1단계)했다. 서구에서 온 유명 설계자들은 일부 작품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한국 땅의 특질과 그에 얽힌 인문적 이해(또는 애정)의 부족함 탓에 위대한 독창성의 마지막 관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패턴을 한국 지형에 복제하는 데 그쳐 진부한 ‘클리셰’를 남발하는(2단계에 미치지 못한) 예도 드물지 않았다. 

 

한국 산야에 대한 이해와 자각

‘북일남화’는 앞에 제시한 3가지 단계의 과제(또는 갈림길) 앞에서, 그 시대의 치열한 성찰을 거친 작품들이다. 손쉬운 형식적 모방을 마다하고 한국 산야의 본질적 개성과 서정을 발견하고 담아내려 한 고심과 노력을 코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은 정맥과 지맥으로 용틀임하며 굽이마다 다른 모양의 산록과 분지, 하천과 들판들을 빚어내다가, 성격이 판이한 삼면의 바다를 만난다. 국토는 좁으나 산 넘고 물 건널 때마다 땅의 모양과 성정이 다르고 사계절은 극단적으로 선명하여, 어느 한 곳 별난 성깔을 품지 않은 데가 없다. 북해의 링크스 지대나 대륙의 평원처럼 자연스럽게 골프코스를 낼 수 있는 땅은 드물지만, 다양하고 특질이 뚜렷한 지형들이 - 땅을 창조적 이해하는 이들에게 -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예술적 작품의 ‘캔바스’로 쓰일 가능성을 품고 있다. 
 
화산CC가 한남정맥의 용인 땅 육산(肉山)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데 견주어, 일동레이크는 한북정맥의 거침없는 바위산 등줄기에 앉아 있다(한북정맥은 금강산 북쪽 추가령에서 분기하여 대성산, 운악산을 지나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까지 치고 내려와서 도읍지 서울을 품는 산줄기다).

용인의 화산CC는 선녀들의 전설이 깃든 시궁산 숲속에 오솔길을 낸 듯 서정적이며, 일동레이크는 ‘포천석’으로 유명한 화강암 언덕의 정순한 금(‘오행’의 金) 기운을 딛고 오연하다. 화산CC가 미지의 숲길을 따라 도원경으로 접어드는 한국인의 이상향 서정을 담아내고 있다면, 일동레이크에는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는 파죽지세의 장엄함이 감돈다. 페어웨이 언덕에서 보면, 포천 분지 너머 먼 산줄기들이 파도치듯 첩첩 능선으로 유장하게 흘러가고 땅 밑에선 바위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바람을 부르는 듯하다.

일동의 부벽준(斧劈皴), 화산의 채색 산수 
   
일동레이크 코스의 바위들은 수천만 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었다. 코스를 조성할 때 김학영은, 이 노두(露頭)들을 깨워 드러내는 한편 절리(節理) 모양으로 발파·가공하여 조경 요소로 활용했다. 잔디밭의 고운 결과 대비되는 거칠고 각진 재질감이 시각 예술의 마티에르(matière) 기법처럼 독특한 입체성을 돋워 세운다. 지형 지질의 고유한 특성을 골프코스의 개성으로 끌어낸 것이다.

이 바위들은, 한국(동양) 산수화의 부벽준(斧劈皴, 도끼로 찍은 듯한 느낌을 내는 붓질 표현) 기법으로 그려낸 듯한 모습이다. 발파 조경하면서 여러 방법을 시도하는 중에, 이 지역 화강암질의 결대로 갈라져 이런 조형이 나왔다고 한다.

뒷날 마이다스밸리(권동영 설계)와 휘슬링락(테오도르 로빈슨 주니어 설계) 등에서도 노두를 활용하는 조경을 완성도 높게 발전시켰는데, 땅속 바위를 코스에 적극적으로 노출하여 예술적 질료로 활용한 예는 일동레이크가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더 나아가, 운악산-도봉산-북한산-인왕산의 바위 산줄기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근골을 코스 안에 살려냄으로써 일깨워낸, 인문 서사적 향기는 독보적이랄 만하다.

(한 세대가 지나면서 바위 틈새로 풀과 나무들이 자라 노두의 모습을 적잖이 가리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코스의 멋과 맛이 무뎌지는 느낌도 든다. 코스 조경 요소인 바위틈의 식생천이를 억제하는 것이 자연 보호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화산CC에서는 나무(식물)들이 입체 예술 효과를 낸다. 그 이전에는 골프장에 잘생긴 소나무들을 심어야 하는 줄로 여겼다(일본풍 또는 안양CC의 영향일 것이다). 화산CC는 비싼 조경수들을 들이지 않고 산중에 흔한 느티나무, 참나무, 벚나무와 철쭉 등을 잣나무를 비롯한 평범한 상록수와 함께 옮겨 심었는데,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잎이 물들며 채색 산수화처럼 자유분방한 색감 질감·양감이 변주된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국 중부지역 산야의 자연미를 재발견하여, 시간 흐름에 따라 4차원 다중입체로 변화하는 시공간을 구성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일동레이크 해석을 위해 ‘북일남화’의 의미를 거론하는 것이므로, 화산CC 이야기는 줄인다.)

영성이 흐르는 언덕, 산맥을 받아내는 연못

일동레이크 홀들 경계 부분의 조형도 주목할만하다. 물결 같고 부드러운 능선 같기도 한 둔덕(마운드)들이 리듬감 있게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조형은 (빗맞은 공이 나가지 않게 잡아주며) 이후 한국 골프장에서 적지 않게 시도되어 오는데, 이곳만큼 아취(雅趣) 있는 것이 드물다. 마운드들은 주로 포천 분지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조성되어 있어서, 멀리 흘러가는 산줄기들의 첩첩 능선과 조응한다. 또한 이 코스가 올라탄 한북정맥의 구름 같은 흐름을 강조 표현하고 있다. 코스 안의 언듈레이션들과도 부드럽게 이어진다.

마운틴코스 페어웨이 언덕에 서면, 마운드 아래의 분지와 그 너머 먼 산줄기들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는 바닷가 사구(Dune)의 느낌도 든다. 마운드들이 이어지는 곡선과 하늘이 맞닿는 스카이라인, 해질녘의 음영(陰影)이 이 조형 미감의 핵심일 터인데, 잘생긴 소나무들을 둔덕 비탈에 드문드문 심어서 가려놓았다. 이 나무들이 없다면, 마운드 위의 빈 공간이 하늘과 바람의 영성(靈性)이 흐르는 제단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설계자에게 물으니 처음엔 그 자리에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마운드 조형의 본디 의도를 따라 알맞은 자리로 옮겨 심으면, 값진 조경수들도 더 귀한 몫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일동레이크에는 일곱 개의 연못이 열 개 홀에 걸쳐 이어지며 물이 흐르고 있다. 이 가운데 전후반 각 코스의 8번·9번 클라이맥스 홀들에 이어진 연못들이 김학영 골프코스 연못 설계·조형의 정수를 보여준다.
 
연못의 경계는 다도해의 해안선이나 산골의 사행천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플레이 지역과 만나는 면을 최대화하며 이어진다. 연못 경계는 이곳에서 나는 화강암을 부정형으로 쌓아 마감하여 산중 선경의 포석 정원(Rock Garden) 모양을 냈다. 바위 산맥의 강맹한 직진 기운을 연못의 부드러운 곡선 조형으로 받아내어 순화하고 있다.
김학영이 설계한 에이원CC와 테디밸리 골프장에서도 연못들은 유려한 자유곡선을 그리며 플레이어의 환상과 도전욕을 일깨운다. 에이원CC 서코스 5번(토너먼트에서는 18번) 홀에서 연못 위에 페어웨이를 섬처럼 띄워놓는가 하면, 테디밸리 13번 홀에서는 삼방산을 연못 안에 품듯이 조형하여 시그니처 홀을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그 지역 서정과 지질·지형에 대한 이해 없이 나오기 어려우며, 설계자가 도면에 그려 넣는다고 해서 완성할 수 있는 조형이 아니다. 김학영은 자신의 설계 역작에서 공사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며,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공정까지 감리했다고 한다. 

 

김학영은 골프코스 설계에서, 화려한 기교보다 지속 가능성과 기능적 완성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전개 리듬, 승부 구간의 구성에 탄탄하고 극적인 짜임새를 주었다.
김학영은 골프코스 설계에서, 화려한 기교보다 지속 가능성과 기능적 완성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전개 리듬, 승부 구간의 구성에 탄탄하고 극적인 짜임새를 주었다.

기능과 기본을 엄정히 지킨 설계

김학영은 골프코스 설계·조성에서, 화려한 배치·조형 기교보다 지속 가능성을 위한 기능적 완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일동레이크에서도 그런 생각을 지켰다.

첫째, 거의 모든 홀들의 진행 방향을 정남북으로 배치하고 관개용수와 배수 흐름을 잡았다.

한국의 기후는 잔디 생육에 적합하지 않은 데다가 일동레이크는 위도와 고도가 높은 지역에 위치하므로, 햇빛을 최대한 받게 해야 한다. 또한 산맥의 서쪽 사면에 있기에 석양이 플레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다. 그는 홀 진행의 남북 방향을 철저히 지키고 응달지는 곳이 없도록 일조량을 확보했다. (11번 홀 하나만 동서 방향 배치이므로, 햇빛을 마주보며 플레이하는 홀이 없다). 일곱 개의 연못에 충분한 물을 담아 회전시킴으로써 가뭄에 대비하고, 암반 지형의 공사 어려움 속에서도 배수 기능을 세세하게 확보했다.

김학영 설계 코스에는, 플레이가 잦은 페어웨이 구역에 맨홀이 없다. 그는 말했다. “페어웨이는 고속도로 같은 곳이니 주요 동선에 맨홀을 놓지 말아야 해요. 공이 놓인 그대로 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기본입니다. 그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 코스들이 많아요.”

둘째, 거의 모든 홀의 티잉 구역에서 그린이 보이거나 그린 위치가 확인되도록 조성했다.

티잉 구역에서 그린이 보이지 않더라도 세컨(어프로치)샷에 지점에서는 공략 목표가 잘 보인다. 일동레이크에는 도그렉 홀도 거의 없다. 전략적인 설계를 위해 휘어지는 모양으로 만든 홀은 있으나 휘어짐의 각도가 완만하여 플레이어가 타겟을 확인하고 능동적인 전략으로 공략하게 했다.

그는 장려한 직선 홀을 즐겨 만든다. 사선 배치나 휘는 모양, 또는 블라인드 홀은 결정적인 승부 구간에서 절제하여 구사한다. 일동레이크는 물론 KPGA 챔피언십이 열리는 에이원CC에서도 직선형 홀이 코스의 뼈대를 이룬다. 그런데도 플레이어들에게 다양한 샷 기술을 구사하도록 주문한다. 버드우드(현 골프존카운티 천안)에서는 30만 평 정도의 땅에 18홀을 넣으면서 거의 모든 홀을 직선형으로 조성했는데도, 홀마다 다른 변화를 담아 18홀 내내 샷마다 다양한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가 들려준 말이다.

“똑바로 가는 홀 만들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설계자의 실력 부족을 감출 구석이 없어요. 그린이 빤히 보면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어서 여러 가지 샷을 잘 쳐야 하도록 만든 홀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셋째, 잘 치는 선수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재미를 느끼도록 설계했다.

그는 일동레이크와 에이원CC 등 자기가 설계한 코스에서 프로 토너먼트가 열리는 것을 기뻐했으나, ‘토너먼트 코스’라고 성격을 규정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국제 토너먼트 개최까지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일반 골퍼들이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골프는 잘 치는 선수들만 위한 것이 아니므로 - 토너먼트 때는 프로 선수끼리의 실력 차이까지 변별하도록 셋업 가능하지만 - 평소에는 일반 골퍼들이 좋은 점수를 낼 수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벌형 홀’이나 ‘영웅형 홀’ 같은 설계 도식을 적용한 예도 드문데(일동레이크엔 아예 없다), “그런 설계 기법을 쓴 홀들이 많으면 근사해 보일 순 있어도, 결국은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를 더 괴롭히는 코스가 되기 쉽다”고 했다. “화려하거나 어려운 코스를 원하는 의뢰인도 있겠지만, 그런 코스는 처음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동레이크에 대하여, “볼을 칠만한 코스”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벙커와 연못 등 장해 요소들이 골퍼의 플레이를 ‘부정적’ 몸짓으로 막아서기보다는 플레이의 재미를 돋우는 ‘긍정적’ 장치 역할을 많이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넷째, 홀 전개의 배열과 리듬, 승부 구간의 드라마 구성이 탄탄하다.

전후반 각각 짜임새 있는 운율과 승부 구간을 갖고 있다. 정확하게만 공략하면 버디를 노릴 수 있는 홀, 난도가 높기에 ‘지켜야 하는 홀’, 도전을 부르는 홀들이 강약 리듬을 타고 가다가 후반부에서 승부의 변화가 극적인 홀들로 마무리된다. 탄탄한 플롯(Plot)을 갖추었다고 할까. 특히 전반(마운틴코스)과 후반(힐코스) 8번, 9번 홀들은 매치의 승부를 뒤흔드는 전략적 다양성을 갖추고 있으며 창의적으로 아름답다. 힐코스 9번 홀(대회에서는 대개 18번 홀)을 스타디움 형태의 파3로 조성한 것은 대담하고 독특하다.

(김학영 설계 코스는 전후반 각 9홀에서, 4,5,6번 홀 중 하나 – 1,2,3번 홀 중 하나 – 7,8,9번 홀 중 하나 순으로 돌아가며 핸디캡 넘버를 매긴다. 그의 핸디캡 번호는 어려운 홀 순위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가 플레이할 때 핸디캡을 적용하는 순서를 뜻한다. 만약에 핸디캡 1번 홀이 후반-7,8,9번- 홀에 있으면 약자가 핸디캡을 활용할 기회가 사라질 수 있으며, 너무 앞쪽-1,2,3번- 홀에 있어도 불합리하다. 그는 코스 설계에서 핸디캡 부여 순서까지 고려하여 난이도 리듬을 조절한다고 했다. “아주 기본적인 핸디캡 넘버도 잘못 매겨진 코스가 많아요.”라는 말도 했다.)

넓은 ‘원 그린’과 언듈레이션에 대하여

일동레이크의 그린은 800㎡~1,000㎡ 넓이로 조성되었다. 요즘 한국 골프장들의 평균 그린 면적이 대략 800㎡쯤인 듯하고 손님을 많이 받는 퍼블릭코스들이 1,000㎡ 정도로 만들기도 하는데 견주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최근에 문 연 토너먼트 코스들보다는 꽤 큰 편이다. (잭니클라우스GC 그린이 평균 550㎡ 정도, 해슬리나인브릿지는 600㎡ 남짓, 김학영 설계의 에이원CC 그린 평균 면적이 650㎡쯤 된다) 개장 당시에는 변화가 크고 어렵다는 원성을 듣던 언듈레이션도 최근 추세에 견주면 완만한 편이다.

설계자에게 “지금 다시 만든다면 그린 크기와 언듈레이션에 변화를 주시겠어요?”라고 질문하니 “만약에 다시 만든다면 당연히 요즘 추세를 감안해서 조형하겠지만 지금 그린으로도 프로 대회에서 변별력 있게 셋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골프장이 문 열던 때에, 한국 골프장들은 일본 골프장들을 따라 투 그린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투 그린은 ‘공이 놓인 그대로 플레이한다’는 골프의 기본 원칙에서 변칙을 주어야 하기에, 일본과 한국에서만 편의적으로 일반화된 양식이다. (투 그린의 유래에 대해서는 졸저 ‘한국의골프장이야기’에서 몇 차례 적었다) 한 개 들어갈 공간을 두 개로 나누어야 하므로 그린이 작아져 다양한 언듈레이션을 주기 어렵고, 그린 콤플렉스의 중심이 분산되어 코스의 샷밸류와 전략성 등을 정밀하게 짜는 데 한계가 있다. 다만 교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그린 잔디를 관리하기 좋다.

한국에서 원그린은, 89년 용평GC(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 설계)에서 처음 도입하였고, 93년 개장한 우정힐스CC(페리 다이 설계), 태영CC(더글러스 니켈스 조형설계), 곤지암CC(다키토 미노루 설계)등 외국인 설계가 작품에서 적용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CC, 지산CC(임상하 설계)에서 채택하였으나 국내 골프장들은 원그린 들이기를 꺼렸으며, 코스 관리자들은 대개 완강히 반대했다.

일동레이크(95년 개장)와 화산CC(96년 개장)에서 성공하여 찬사를 받은 이후, 원그린은 ‘대세’가 되어 널리 퍼지게 된다. ‘북일남화’가 확산의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다.

(김학영 설계 코스의 ‘벙커’와 장해물들에 대해서는 차후 다른 코스 편에서 적으려 한다. 특히 벙커들의 위치와 용도, 기능과 조형 등은 도식적 ‘스타일’을 넘어 ‘김학영 벙커 미학’이라 할 만큼 엄정하다고 보기에, 다음에 다른 지면을 내어 해석할 예정이다)

 

토너먼트 코스라는 명성

일동레이크는 개장 이후 많은 프로골프 대회를 치렀다. 1996년 열린 ‘삼성월드챔피언십여자골프대회’에서 애니카 소렌스탐이 우승했고 19세의 박세리 선수가 3위에 올랐다. 이후 KPGA 프로테스트 본선, KPGA신인왕전, SK텔레콤오픈, 우리투자증권레이디스챔피언십, KLPGA챔피언십 등을 치러왔다.

그런 과정에서 ‘토너먼트 코스’라는 명성이 붙었다. 설계자는 “일부러 난도를 높여 프로 토너먼트에 중점을 두지는 않았다”고 말하지만, 투어프로 선수들의 실력을 고르게 변별하는 코스로 활용되어왔다. 총 전장 7,209야드 파72로 구성되어, 남자 프로 대회에서는 파71로 셋업되기도 한다.

선수들의 기량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향상되면서 이 코스에서 열린 대회의 상위권 타수도 낮아지고 있다. 대회 리더보드의 타수보다 눈여겨볼 사실은, 이 코스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승부가 뒤바뀔 듯 흥미진진한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시원한 장타 쇼를 부르면서도 후반으로 갈수록 매치플레이 같은 전략적 판단을 유도하며, 마지막 승부에 집중하게 한다. 

개장 후 한 세대의 세월이 흘렀으니 - 토너먼트 코스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 코스 길이와 장해 요소들을 다소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골프전문인들도 있다. (토너먼트를 위한 리모델링은 세계 골프계에서 흔한 일이다. 

인천의 잭니클라우스GC도 2015년 프레지던츠컵 개최를 위해 PGA투어가 설계자 잭 니클라우스의 동의를 얻어 코스 여러 곳을 수정했다) 반면에 설계자의 말처럼 현재 그대로여도 훨씬 까다로운 토너먼트 셋업이 가능하며, 지금의 모습을 전승해 나가는 게 옳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혹시라도 언젠가 부분적으로라도 리모델링 한다면, 김학영 설계의 본질 개성과 가치를 살려내야 함은 물론, 김학영이라는 설계자를 소중한 ‘헤리티지’로 명토 박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계가의 ‘작가 책임주의’ 작품

일동레이크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작가주의적’ 골프장이다. 설계자가 마치 작가주의 영화감독처럼, 설계와 조성 현장을 완벽히 끝까지 지배하며 자신의 독자적 골프 세계관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김학영은 코스의 착공에서 완공까지, 현장에서 감독하고 설계를 다듬고 하나하나의 기능과 조형을 완성했다.

“설계 의도대로 완성되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질문하니 “18번 파 3홀 그린 앞에 움푹 꺼진 할로우를 만들었는데 거기서 고생하는 골퍼들의 원성이 높길래 부드러운 조형으로 바꿨어요. 오르막 홀 페어웨이 바닥 아래 암반을 까내기 힘들어서, 시야가 약간 덜 시원하게 마감된 곳도 있긴 하지만, 어찌 됐든 설계자가 이름 걸고 책임져야 할 것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이후에 맡은 테디밸리 골프장 설계에서 그는 “공사 현장에 상주하며 책임지고 완공할 테니 절대로 설계를 변경하지 말아달라”고 의뢰인에게 요구하여 관철하기도 했다. 자신의 설계대로 완공하지 않은 골프장에 대하여 “내 이름을 설계자 명에서 빼달라”고 요구한 예도 몇 차례 있었다)

국내 골프장 중에서, 설계자의 의도와 손길이 이처럼 일관되게 들어간 곳은 손에 꼽을 만큼 귀하다. 해외에서 초빙된 세계적 설계가의 이름을 건 작품도 대개는 현장의 국내 기술진 손에서 마무리되곤 했다. 외국 유명 설계자들의 작업에는 한국 골프장 소유주들이 요구와 참견이 덜한데 견주어 국내 설계자에게는 ‘갑의 논리’가 통해왔다는 관행도 있었기에, (최근까지도, 특히 한국인 설계자의) 작가주의 골프장이랄 만한 것은 매우 드물었다.

‘북일동’을 되새기는 까닭

글 앞부분에서, 20세기 말 이후 한국 골프코스 전문인들 앞에 놓인 과제를 거론했다.

첫째, 우선 새로운 경향을 빠르게 받아들여 적응하고(1단계) 
둘째, 한국 산야의 특질과 조화되도록 완성하며(2단계) 
셋째, 마침내 고유한 독창성을 확보하는 것(3단계)

‘북일남화’를 한국 골프장 흐름의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보는 것은, 이 삼중과제들을 풀어낼 대안의 하나로서 ‘작가주의’가 한국 전문가들에 의해 처음 발현된 작품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한국 골프장들은 눈부신 기술 발전과 외형 성장을 이루었으며 세계적 수준으로 인정받는 코스들도 나오긴 했으나, 한국 산야의 다양하고 고유한 특질을 본질적으로 풀어낸 독창성이 모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좁은 국토와 개발을 제한하는 여러 법규, 잔디 생육에 불리한 기후와 토양 등 불가피한 제약은 숱하며, 골프장을 들이기 손쉬운 땅은 드물게 남은 형편이다. 반면에, 학습력 높고 열정적인 골퍼들이 늘어나는 추세 등이 - 골프코스의 창의적 개발을 위한 - 세계에서 드문 시장 환경을 열기도 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문화 예술이 질곡 많은 역사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것처럼, 한국의 골프코스 또한 땅과 사람의 다양한 사연과 제약을 자양분으로 독창적 지평을 열어나가기를 기대해본다.

마치 18세기 화가 정선이 한국 땅의 고유함에 눈을 떠 ‘진경산수’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처럼······ 골프의 본질과 시대의 등뼈를 관통하는 새로운 흐름을 기다린다.

 

 

류석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류석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로 184 (엘지분당에클라트) 1차 1208호
  • 대표전화 : 031-706-7070
  • 팩스 : 031-706-707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현
  • 법인명 : (주)한국골프산업신문
  • 제호 : 골프산업신문
  • 등록번호 : 경기 다 50371
  • 등록일 : 2013-05-15
  • 발행일 : 2013-09-09
  • 발행인·편집인 : 이계윤
  • 골프산업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골프산업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lfin7071@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