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비치 - 하늘이 내린 자리, 사람이 빚은 코스
파인비치 - 하늘이 내린 자리, 사람이 빚은 코스
  • 골프산업신문
  • 승인 2023.02.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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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무 작가의 대한민국 명작 골프장 해석 (4)
파인비치는 스스로의 자산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키울 수 있는 골프장이다. 특히 비치코스 후반에는 하늘이 이곳에 특별하게 내린 빛과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파인비치는 스스로의 자산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키울 수 있는 골프장이다. 특히 비치코스 후반에는 하늘이 이곳에 특별하게 내린 빛과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류석무 작가의 글을 연재합니다. 그는 우리나라 골프장들의 이야기들을 상세히 발굴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한국 명작 골프장 해석’은 ‘이야기’보다 한 발 더 깊이 들어간 ‘해석’을 통해 새로운 문화 지평을 발견하는 ‘대안 비평’입니다. 한국 최고의 골프장 스무 곳을 차례로 톺아보고자 합니다. - 편집자

‘하늘이 내린 홀’이라 하면, 한국에서 어디를 꼽겠는가.

파인비치골프링크스는 하늘이 절반쯤 빚어놓은 곳이다. 곶(串,Cape)과 만(灣,Bay)으로 굽이치는 해안선을 따라 골프코스를 앉혔다. 홀들은 수평선에 닿을 듯 반도의 모서리를 감아 돌고, 파도는 플레이어의 발끝에 밀려와 가슴을 물들인다. 흩뿌린 꽃잎처럼 섬들이 바다에 떠다니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갇힌 형상이 드러나도록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했다. 신(神)이 감추어 놓은 형태를 인간이 감동할 모습으로 꺼내는 작업이 조각 예술이라고 여겼다.

전라남도 해남 파인비치 터는 골프코스 자리를 찾는 이들에게, 마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의 모습을 찾아낸 거대 대리석 같은 질료(質料)다. 하늘이 절대 형상을 가두어 놓은 곳. 미켈란젤로 버금가는 예술가나 그의 천재성을 갈음할 노력과 통찰에 몸 바친 장인(匠人)을 기다려온 땅이다.

아직 충분히 발견되지 않은 본질가치

한국의 바닷가에는 골프장을 만들 수 없었다. 영토의 삼면이 바다이며, 곶과 만의 드나듦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 희귀 리아스식 해안을 가졌으면서도, 연안관리법 등의 규제가 오래 가로막아 왔다. 이천년대 초 ‘한국관광공사’가 전남 지역의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화원관광단지(현 오시아노관광단지)’를 조성하면서, 이 특별한 땅에 골프장이 허가되었다.

2010년 9월 문을 열 때부터 파인비치는 주목받았다. ‘국내 최초 진정한 시사이드 코스’라는 평가를 넘어 자칭 타칭 ‘한국의 페블비치’라고 불리는가 하면, “사이프러스포인트 16번처럼 바다를 건너 치는 파3 홀이 있다”는 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동안 파인비치는 제대로 평가되거나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문 연 이후 골프매거진과 골프다이제스트 등의 코스랭킹 평가에서 비교적 높은 등위에 오르내렸으나 최상위권까지 치고 오르지는 못했었다. 공교롭게도 개장 무렵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를 겪는 가운데, 애초에 고급 회원제 클럽을 지향하다가 대중제 골프장으로 전환하였으며, 정체성을 되잡는 시간을 여러 해 거쳤다.

(골프코스에 대한 평가에서 코스 자체 가치 밖의 요소들은 적잖이 개입되어온다. 골프장 모기업의 위상, 클럽 회원 그룹의 폐쇄성 정도, 시설의 ‘럭셔리’함과 이용 가격 등 사회적 선망을 부르는 ‘계급감階級感’은 일반 골퍼들 뿐 아니라 전문 평가위원들에게도 강렬한 선입견을 주곤 한다. 파인비치에 대한 평가에서는 이런 ‘코스 외적 요인들’이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곳은 재벌그룹의 후광을 업은 골프장이 아니며 누구나 라운드할 수 있는 퍼블릭코스다. 호화로운 시설이나 높은 가격을 내세운 차별화 마케팅을 펴지도 않아 왔다.)

파인비치에 대한 평판과 인기가 부쩍 높아진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현상이다. 텔레비전 골프채널 프로그램에서 코스 풍광이 자주 소개되더니, 온라인 SNS를 타고 그림 같은 홀들 사진이 전파되면서 국내 골퍼들의 ‘버킷리스트 코스’로 떠올랐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도 전남 인근 골프장들과 비슷한 요금을 받았는데, 지금은 수도권 전통 명문들 못지않은 가격을 지키며 성황을 이루고 있다. (시사이드 코스로 함께 견주어지는 사우스케이프의 초고가 마케팅에 얼마간 편승했달 수도 있으나) 시장 가치가 상승했다고 하겠다. 최근 발표된 일부 코스랭킹 평가에서 국내 최고급 전통 명문 코스들과 최상위권에서 겨루는 성적도 보인다. 골프장 자체의 장점과 매력 - ‘본질가치’가 비로소 드러나 빛을 보는 것이랄 만하다.

중요한 사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파인비치의 가치와 매력이 무진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페블비치’라는 비교·비유에 대하여

‘파인비치골프링크스’는 ‘페블비치골프링크스’를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름이다. 이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 골프장 소유주와 설계자 개리 로저 베어드(Gary Roger Baird)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쪽 몬터레이 반도의 ‘17마일 드라이브’ 해안도로 인근 유명 골프장들(페블비치, 사이프러스포인트, 스파이글래스힐 등)을 견학하며 참조했다고 한다.

그런 답사 과정 때문인지 문을 열 때부터 페블비치 등에 대한 동경과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우리 파인비치는 태평양 건너 페블비치골프링크스, 사이프러스포인트와 워터해저드를 함께 쓰고 있어요”라는 우스개를 홍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 코스들을 ‘오마쥬(Hommage)’하여 설계했다고도 했으며, 홍보 기사에는 ‘한국의 페블비치’라는 제목이 주로 달렸다. “페블비치는 아홉 개 홀에서 바다와 함께하고, 사이프러스포인트는 세 개 홀에서 바다를 건너는데, 파인비치는 아홉 개 홀에서 바다를 만나고 두 개 홀에서 바다를 건넌다”는 투의 설명도 따라다녔다.

당시 코스 설계자는 아마도, 페블비치와 사이프러스포인트 등을 모방이나 ‘오마쥬’ 함을 넘어 ‘뛰어넘을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개리 로저 베어드는 “내가 설계한 코스 중에서 최고의 절경은 파인비치다”라고 했는데, 아티스트로서 세계 그 어느 곳에 견주어도 독특하게 빛나는 골프코스를 빚어내고 싶었을 터이다. 더 나아가 비교 불가한 영원성을 지닌 코스를 꿈꾸었을 수도 있겠다.

 

‘링크스(Links)’라는 이름은 적합한가

‘파인비치골프링크스’라고 이름 지었지만 ‘링크스’라 부르기에 이 골프장은 너무 곱다.

링크스란, 좁게는 골프가 비롯된 스코틀랜드 해안의 특수한 지대를 뜻하고, 골프에서는 그와 유사한 지질·지형 특성을 보이는 해안지대를 가리키기도 하며, 더 나아가 링크스 지대의 자연 특성을 구현·활용한 골프코스 유형을 일컫는다.

링크스는 북해 바닷가의 사구(砂丘, Dune) 지대다. 빙하지대가 녹아 드러난 해변 언덕에, 지속적인 파랑(波浪)의 영향으로 쌓인 모래땅이다. ‘둔덕’ 또는 ‘등성이’를 뜻하는 고대 영어 ‘Hlinc’가 어원이라 한다.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사빈(砂濱, sand beach, 모래해변)을 이루고, 그 모래는 강한 바닷바람에 육지 쪽으로 날아가 쌓여 해안사구를 형성한다. 사구는 바람을 맞으며 또 다른 사구들을 파생시킨다.

바람과 파랑이 거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해변에는 사구들이 중첩하여 쌓인 뒤 파랑과 해풍에 단단해진 경계 지대 – 링크스(Links)가 형성되어온다. 수천수만 년 동안 쌓인 모래가 소금기에 젖어 단단해지고, 새들이 물어온 씨앗이 풀로 자라나 더 단단히 모래를 고정시킨 땅이다. 비바람에 깎인 표면이 파도처럼 굽이치는 바람단지다.

골프가 시작된 이후 수백 년 동안 골프장은 곧 링크스였다. 울퉁불퉁한 모래언덕 사이로 양떼가 풀을 먹으며 지나간 자리가 페어웨이가 되고 들짐승이 파헤친 자리가 거친 바람에 무너져 벙커가 되었으며, 토끼가 풀을 먹은 자리 적당한 곳에 구멍을 뚫고 과녁을 삼은 게 골프코스의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골프는 그 거친 땅에서 바닷바람과 싸우며 발전해왔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페블비치골프링크스가 이름에 ‘링크스’를 붙인 까닭은, 태평양 연안의 코스로서 링크스의 특성을 닮고자 했기 때문이다. 골프가 세계로 퍼지던 19세기 후반 이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바닷가 아닌 지역에서도 링크스코스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왔다.

특히 골프코스의 클래식 시대(1900~1930년대, 중장비가 없던 때)부터 미국과 호주 등의 바닷가에 링크스를 재현하거나 비슷하게 변용한 골프장들이 조성되었다. 1919년에 문 연 페블비치골프링크스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코스 디자이너를 비롯한 골프 전문인들 가운데는 “다른 모든 형태의 골프코스는 링크스의 모방”이라고 생각하는 ‘원리주의자’들이 많다. 그들은 페블비치에 대해서, 링크스 스타일을 일부 띠고 있을 뿐 진정한 링크스코스는 아니라고 여기기도 한다.

(George Peper와 Malcolm Campbell이 2010년 펴낸 책 ‘True Links’는 “전 세계 수많은 골프장 들이 링크스를 자처하지만, 진정한 링크스는 246개뿐”이라고 구분 짓는다. 그중 북미 대륙에 있는 코스는 다섯 개이며 페블비치는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의 해안에는 링크스 비슷한 땅이 형성되지 않는다. 간혹 사구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강한 바람과 거친 파랑이 만들어내는 ‘링크스 - 듄스’ 지대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 없다. 링크스의 본질을 재해석한 ‘링크스 스타일’ 골프코스를 시도하거나, 링크스의 특징적 요소들을 이 땅의 성품에 맞추어 부분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링크스보다 희귀한 ‘리아스’ 해안 지형

해남 파인비치 자리는 링크스와는 뚜렷이 다른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 지형이다. 리아스식 해안은 지구상에 드물고 특히 한국 서남해안의 지형은 세계에서 희귀한 모양이다. 그 형성 과정이 장구하고 각별하기 때문이다.

링크스는 다른 땅에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지만, 리아스식 지형은 오직 하늘이 내릴 뿐이다.

한반도 지질 분포는 중국 땅 전체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한다. 중생대 수억 년 동안 한반도 부근에서 거듭된 지각변동은 복잡하고 다양한 갈래의 바위층을 만들어 놓았다.

이천만 년 전쯤 그 땅덩어리에 동해 지각이 확장해 부딪치면서, 동쪽에 백두대간이 솟아오르고 서쪽은 완만한 동고서저 지형을 형성한다. 이에 따라 골짜기와 하천은 주로 남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 뒤 집중호우가 빈번한 기후가 계곡과 하천의 침식을 촉진하여, 능선과 골짜기가 갈래갈래 선명해지고 거듭된 풍화 속에 잔근육처럼 섬세한 지형이 만들어진다.

그러던 이만 년 전쯤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며 해수면이 점차 상승한다. 한반도 남서쪽의 낮은 골짜기들은 바다에 잠기고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섬으로 변한다. 그와 함께 굽이굽이 변화무쌍한 해안선이 만들어졌다. 기암괴석 벼랑의 볼록한 곶(Cape)과 오목한 만(Bay)만 들이 끝없이 이어진 바닷가에, 장구한 세월 동안 밀물과 썰물이 하천의 흐름과 감응하면서 크고 작은 백사장과 갯벌들을 쌓고 다듬었다.

설계자 개리 로저 베어드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파인비치를 꼽으며 “해남의 지형은 신의 선물이며, 설계자의 일은 신이 감춰 놓은 코스를 찾아내는 것뿐”이라고 찬탄했고, 조형 설계를 완성한 데이비드 데일은 “파인비치는 자연이 디자인한 걸작이다”라고 말했다.

신(神)의 음률을 듣는 구간

해남은 한반도의 맨 아래 달린 반도 모양 땅이며. 파인비치가 있는 곳은 해남 서쪽 끝에서 다시 머리 들고 나온 화원반도다. 그리고 이 골프장 비치코스는 거기서 다시 벋어 나온 작은 반도 형상이다. 거기서 또 한 번 엄지손가락처럼 솟은 아기 반도 절벽 위에 15(비치코스 6)번 파3 홀 그린이 앉아있다.

14번(비치코스 5번) 홀부터 18번 홀에 굽이치는 드라마는 파인비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좁히자면, 14번 홀 그린에서 바다를 만나고 15번 파3 홀에서 바다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16번 홀에서 바다를 건너 돌아 나오는 구간은, 플레이어에게 예술적 감동의 절정과 경기의 극적 반전을 동시 변주해 안겨준다.

코스 설계가 권동영 씨는 이 구간 흐름에 대해 말한다.

“북쪽 바다를 향해 돌출한 암벽 끝에 그린이 놓인 경관은 누구에게나 탄성을 자아낸다. 200야드 남짓한 이 파3 홀에서, 여름에는 뒷바람의 도움을 받지만 겨울에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거슬러 바다를 건너야 한다. 이어서 16번 홀 티잉 구역에서는 해풍이 반대로 변하는 반전이 일어난다. 움푹하게 만입해 들어온 바다를 건너 암벽 위의 페어웨이를 향하게 된다. 이 극적인 시퀀스는 자연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이 홀들이 사이프러스포인트 16번, 17번 구간을 닮았다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앞에서 쓴 것처럼, 골프장 소유주와 설계자가 그곳을 찾아 벤치마킹했다는 사연도 전해졌고, 사이프러스의 ‘오마쥬’라는 홍보 글귀가 떠다닌 바 있다. 이런 비교·비유를 아직 설득력 있게 듣는 이도 있겠지만 – 사이프러스포인트의 그 홀들이 불멸의 지상 최고 예술 작품이라 할지라도 - 이제는 아류를 자처하고 자기 값어치를 제한하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겠다.

파인비치는 스스로의 자산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키울 수 있는 골프장이다. 특히 비치코스 후반에는 하늘이 이곳에 특별하게 내린 빛과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그 음률을 스스로 찾아내고 고유한 음색으로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비치코스 후반 - 14번 홀 그린에서 18번 홀까지는 바다를 안고 플레이한다. 바다를 마주 보며 어드레스하고 바다를 향하는 기분으로 진행한다. 대자연이 낸 길을 그대로 따른 흐름이다. 바다에는 헤아릴 수 없는 섬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떠다니고 있다(해남 인근 바다의 섬은 1004개라고 한다). 이 섬들이 바람과 파도를 막아 지중해처럼 고운 파도를 보내준다. 가까운 바다에 여객선, 먼바다에는 무역선 등 크고 작은 배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싣고 오간다.

15번 파3 홀에서는 그린 너머 먼 곳의 수평선과 아스라한 섬들이 어우러지며 다감한 서정을 빚는다. 신화적 경외감이 드는가 하면 섬마을의 애틋한 꽃향기가 바람에 묻어와 스치는 것 같기도 하다.

 

파인비치는 세계에서 희귀한 자리에 있다. 리아스식 해안 풍광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변화막측한 자연과 겨루고 교감하는 골프의 본질을 장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파인비치는 세계에서 희귀한 자리에 있다. 리아스식 해안 풍광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변화막측한 자연과 겨루고 교감하는 골프의 본질을 장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골프를 승화하는 5차원의 기억

이 바다에선 모든 것이 움직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 드나들며, 바다는 시간마다 빛깔과 바람을 바꾼다. 곶과 만 사이로 바위 절벽과 백사장, 그리고 갯벌이 교차하는 해안은 홀이 바뀔 때마다 다른 자태로 플레이어를 맞는다.

오후에 라운드하면 16번 홀 지날 즈음부터 노을 지는 바다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섬들은 빛과 시간을 타고 흐르는 듯 멀어졌다가 다가서고, 해질녘의 하늘은 연보라색에서 금빛과 주황색으로 다채롭게 변화하다가, 이윽고 핏빛으로 물든다.

코스 안으로 눈을 돌리면 겨울에는 붉은 동백꽃이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지고 봄부터 가을까지 다른 꽃들이 제멋에 피고 진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꽃이 피고 늦게 지기에 ‘화원(花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계절마다 다를 뿐 아니라 아침과 저녁, 매시간, 홀을 지날 때마다 다른 - 이 곳에서의 골프는, 단순 3차원 공간 스포츠를 넘어, (4시간 남짓한) 플레이 시간 흐름 속에 다채로운 공간의 변화가 순차적으로 겹쳐지는 4차원적 시공간 체험의 기억을 새겨주곤 한다. 인상적인 몇 개 홀들에서의 플레이는, 마치 ‘인터스텔라’ 영화 주인공이 5차원에서 과거의 기억 상황을 찾아 들어가는 장면처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추억으로 남는다.

(골프는 샷 하나로 치면 3차원의 운동이지만 - 훌륭한 코스에서 할수록 - 한 라운드로 보면 4차원적 게임이고, 인생으로 보면 5차원까지 넘나드는 여행이다.)

이 글은 파인비치를 예찬하려는 게 아니다. ‘하늘이 내린 자산’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갖고 있음을 – 그 정체성과 가능성을 되짚을 뿐이다. 링크스의 변화막측한 북해나 망망대해 심원한 태평양과는 다른, 고유한 바닷가에서 ‘희귀하게 축복받은’ 골프코스 자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비치코스, 사람이 빚은 파인코스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 사진과 조성 이후 사진을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파인비치만큼 원래 지형대로 만든 코스는 드물 듯싶다. 바다 절벽 위에 있으면서도 최고점과 최저점의 표고 차이가 20미터쯤으로 평활한 땅이다. 굽이굽이 해안선을 따라 바다 언덕에 홀들을 배치할 수 있는 반면, 육지 쪽의 홀들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지형이다.

설계자는 바다 절벽 위의 홀들을 후반에 집중하고, 바다가 안 보이는 홀들은 주로 전반에 두었다. 경기가 점점 무르익어 긴장이 고조될 무렵에 바다를 만나서, 강렬한 감동과 반전을 경험한 뒤에 장려하게 마무리하는 구성이다.

바다를 만나는 후반(비치)코스 14번부터 18번 홀 구간은 ‘하늘이 내린 코스’랄 만하다. 이에 견주어 전반(파인) 코스에서는 호수를 파고 아일랜드 홀을 들이는 등 파크랜드 코스의 인공적 조형기법이 적용되었다.

나는 [한국의골프장이야기] 파인비치 편에서 ‘상대적으로 억울한 파인코스’라고 썼다. 만약에 이 9홀이 다른 골프장에 그대로 놓였다면 ‘웰메이드’ 코스로 칭송받았을 터인데, 비치코스의 후반 홀들이 압도적인 절경인데 견주어 평범해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런 가운데 8번 파3 홀이 액센트를 주며 파인코스 전체 격조를 끌어올린다. 해남의 다감한 산야를 거닐다가 문득 다른 행성으로 차원 이동한 듯, 액자 속 그림 같은 바다와 마주친다.

오목하게 작은 만으로 들어온 바다 위에 그린이 떠 있고 섬들은 돛단배처럼 떠간다. 티샷할 때 동백꽃이 붉게 떨어지고 있다. 세상에 오직 나만을 위한 바닷가(Private beach) 느낌이랄까. 비치코스의 바다 홀들이 하늘이 내린 경관을 찬양하는 교향시 같다면, 이 파3 홀은 다도해의 섬들을 그리워하는 엘레지처럼 애틋하다.

코스 자체의 완성도와 조형 감각

샷밸류와 난이도, 다양성, 기억성, 심미성 등 ‘코스랭킹’ 평가항목으로 이 코스의 가치를 가늠하려는 시도는 냉철한 결과를 내기 어렵다.

우선 만점과 배점의 기준이 혼돈스러워진다. (홀들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해도) 자연이 빚은 절대적인 홀들이 다른 코스의 인공적 ‘웰메이드 홀’들과 같은 점수(대개 10점)를 받거나 미세한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면 공정한 것인지, 혹은 가중치를 받을 기준이 계량적으로 정밀하지 않은 가운데서의 인상적 평가가 정확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파인비치는 18홀 6720미터(7349야드) 파 72로 조성되었다. PGA 투어 급의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는 전장이다(바닷바람 부는 곳임을 감안하면 더욱 충분한 길이다).

최근 조성된 코스 중에는 - 대회 개최를 위해서나 코스의 위상을 높이려고 – 더 길게 만든 것들도 더러 있다. 그런 골프장들이 코스랭킹 평가 ‘난이도(Resistance to score)’ 항목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전장이 길거나 형벌적 장해 요소들이 많은 코스를 숭배하는 것은, 난이도를 단순한 ‘어려움(Difficulty)’으로 오해한 까닭일 수 있다.

파인비치 코스의 샷밸류와 난이도 구성은 국제적 프로골프 토너먼트나 매치플레이에서 최고 수준 선수들의 기량을 변별하는 셋업이 가능하고, 휴양지 코스로서 일반 골퍼들의 플레이 재미를 돋우기에도 충분하다.

매 홀 매 샷에서 복수의 샷 옵션(전략을 선택하고 공략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지는 전략적 조형이 이어진 가운데, 영웅형 홀과 형벌형 홀이 결정적인 강조점을 찍고 있다. 그 안배가 모범답안처럼 정연하다.

이 코스의 조형 설계자 데이비드 데일은 부지의 특성을 입체적으로 강화하는 조형(Shaping plan)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로널드 프림이 설립 운영하던 ‘골프플랜’에서 설계를 시작해 파인비치 작업 이전에는 나인브릿지와 파인힐스 등의 조형 설계를 맡아 실질적 설계자 역할을 했다. (2006년에 그는 로널드 프림으로부터 골프플랜을 인수했다) 골프플랜은 로널드 프림이 이끌 때부터 강렬한 언듈레이션 조형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데이비드 데일은 이러한 특징을 세련되게 발전시켜 부지 특성에 맞는 입체적 조형과 조경을 찾아내는 한편, 그것들을 코스의 전략적 완결성과 조화시키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파인비치에서 그는, 리아스식 해안 지형의 독특한 형상을 코스에 받아들여 물결치고 굽이치는 듯한 입체 조형을 빚어냈다. 스루 더 그린의 굴곡은 코스 아래 넘나드는 밀물과 썰물에 조응하고, 마운드 곡선은 바다 위의 섬들과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거의 모든 조형 요소들이 플레이의 한 샷 한 샷에 전략적으로 작용한다. 14개 클럽을 두루 사용하게 하면서 다양한 구질의 샷 구사 능력을 테스트하는 ‘기본 틀’이 잘 짜인 위에, 바람의 변화와 조형의 디테일이 어울려 다채로운 상황을 빚어낸다.

 

하늘이 내린 길, 관(官)이 정한 계획

파인비치는 세계에서 희귀한 자리에 있다. 리아스식 해안 풍광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변화막측한 자연과 겨루고 교감하는 골프의 본질을 장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운명적 골프코스 터’랄 만하다. 골프코스를 예술의 측면으로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신이 감춰둔 형상을 찾아낸 대리석처럼 귀한 질료다. 모범답안처럼 잘 만든 코스를 기다려 온 자리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이 골프장을 지을 때 벤치마킹 했다는) 페블비치골프링크스의 설계자 중 한 명인 잭 네빌은 “그저 해안선을 따라 되도록 많은 홀들을 배치하는 데 중점을 두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다. 네빌의 말처럼 이 골프장 파인코스도 해안선을 따라 더 많은 홀들을 배치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바다를 향해 파인코스 1번 홀을 출발해서 2번, 3번 홀까지 해안을 따라 진행할 수는 없었는가. 지금 7번 홀 티잉 구역 뒤편 숲으로 남은 바다 언덕에 파3 홀을 만들었다면, 다도해의 파도 위 그린을 내려보며 치는 ‘시그니처 홀’이 될 수 있었으리라. 첫 홀에서 마치 그리스 신화의 아킬레우스가 바다를 향해 출정하는 듯하고, 둘째 홀에서 바다를 건너, 셋째 홀에서는 바다 끝의 괴물이나 요정을 만나는 서사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런데 개발 당시 사정을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그(현재 7번 홀 뒤) 자리는 개발 당시 한국관광공사가 화원관광단지 계획에서 호텔 부지로 정해 놓은 곳이라고 한다. 골프장에선 손댈 수 없는 땅이라는 것. 마스터플랜에서 호텔 위치를 변경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질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바닷가에 골프장을 들이는 일은 파인비치가 국내 처음이어서, 조성 과정에서 수많은 제약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과거에 없던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가운데 부딪는 상황이 많았다는 사연이다.)

아쉽지만 이해할 만하다. 더 아쉬운 사실은 지금도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골프코스가 타고난 운명

아직도 제약들은 적잖은 듯하다. 이 골프장에는 소나무들이 많다. 특히 바닷가 언덕에 줄지어 선 해송들은 다도해의 절경을 가리며 눈에 띈다. ‘파인비치’라는 이름 뜻에 맞춰 세워둔 것인지 모르겠으나, 바다 절벽 위에 공들여 골프코스를 만들어놓고, 굳이 코스와 바다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15번 파3 홀 그린 주변에 무성한 나무들은, ‘하늘이 내린 홀’의 가치를 무디게 가린다. 이 나무들이 없다면(다른 곳에 옮긴다면), 그린 너머 먼 수평선과 섬들이 플레이어의 눈에 거침없이 다가올 것이다. 또한 바다 언덕 끝의 거친 바위들이 존재감을 되찾으면서, 이 홀에 ‘신이 감춰둔’ 장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소나무들이 ‘방풍림’으로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골프는 처음 시작될 때부터 바닷바람과 싸우고 교감하며 발전해왔다.)

장소의 본질 매력이 이렇듯 제약되는 것은, 주로 행정 규제 때문이겠다. 골프장을 조성할 때 원형보존림을 일정 비율 남겨야 하는 규정이 엄격하다는데, 바다 언덕보다는 내륙 쪽에 두도록 용인하는 등의 행정적 안목과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골프장 측의 선입견이 스스로를 제약하기도 할 터이다. 한국 골프장 조경의 해묵은 관행 - 골프장에 소나무 들이기를 좋아하거나, 홀들을 따라 조경수를 심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 고정관념에서도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파인비치는 세계 희귀 리아스식 지형의 ‘하늘이 내린 바다 언덕’에 있다.

이 골프장은 ‘한국의 페블비치골프링크스’라고 불린 적 있고, 이름도 ‘파인비치골프링크스’로 비슷하지만, 그 어느 곳과 견줄 필요 없는 고유 가치와 정체성을 품고 있다. 링크스는 다른 땅에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을지언정, ‘리아스’는 오로지 하늘이 내릴 뿐이다.

해남의 바다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보배들로 가득하며, 이 코스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고유 가치가 무진하다. 전 세계 골퍼들이 일생에 꼭 한번 들르고파 할 만한 ‘목적지 코스’로 발전해야 할 운명이랄까.

이런 골프코스를 영위하는 것은 대자연과 함께 빚어내는 예술(Land art) 과업 아니겠는가. 하늘이 감춰둔 궁극의 모습을 온전히 찾아 나가길 기대한다.

 

 

류석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류석무 '한국의 골프장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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